차이를 뛰어넘는 그리스도인 – 팀 켈러, 존 이나주 외 지음

2020년 6월 11일자로 출간된, 나온지 한달도 안된 따끈한 책.
<차이를 뛰어넘는 그리스도인> 이란 이 의미심장한 제목의 책은 저자로서 팀 켈러, 존 이나주 외 지음이라고 되어 있다. 두란노에서 나온 이 책은 팀 켈러의 유명세를 타고자하는 듯이 보이기도 한다.
이 책의 기획은 팀 켈러 목사와 존 이나주 교수의 공동기획으로 시작되었다. 그들이 던진 핵심질문은 프롤로그에서 다음과 같이 나온다.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하면 다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존중하면서도 복음적 확신을 유지하며 그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가?”
열두 명의 기고자는 이 질문을 놓고 한 군데 모여 공동작업을 했다.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공통의 갈망과 열정을 발견했고, 다들 개인적 삶과 다른 이들과의 관계에서 여러 방식으로 상실과 고통, 고립을 경험했음을 알게 되었다 한다. 모두들 이따금씩 자신이 어울리지 않는 곳에 있다고 느꼈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은 차이가 존재하는 세계에서 신실하게 사는 법을 고민하던 자신들에게 하나님이 홀로 애쓰도록 내버려 두시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한다.
미국에서 코로나 상황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을 거리로 나오게 했던 인종 차별 이슈가 이 책에도 녹아 있다. 이 책의 저자들 중 여럿이 흑인이거나 멕시칸이며, 이로 인한 차별의 경험들이 이들의 신앙 가운데 녹아 있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백인 남성임에도 스스로 인종 차별의 한계를 신앙의 힘으로 뛰어 넘으려 하는 어떤 의료인의 이야기였다.
열 두명의 저자가 세개의 세션으로 나누어서 얘기를 한다. 직업의 영역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첫번째 세션은 기독교 사역의 영역이다. 이 부분을 읽을 때는 좋은 얘기인 건 인정하면서도 크게 마음에 와 닿지는 않았다. 내게 보이는 삶의 현장과 많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두번째 세션에서부터 달라진다. 작가, 송라이터, 스토리 텔러(래퍼?), 번역자 (법대 교수) 의 직업을 가진 분들이 자신의 삶의 영역에서의 경험들을 이야기를 중심으로 풀어 낸다. 미국의 상황이라 우리나라와는 다른 면도 있지만, 작가의 글이 다르고, 송 라이터의 글이 또 다르다. 래퍼의 글에서는 참 치열하게 사는 구나 싶고, 법대 교수의 글에서는 한국 기독교의 한 단면을 돌아보게 하는 성찰이 느껴졌다.
세번째 세션으로 가면, 조금더 실천적인 활동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다리를 놓는 것에 대한 이야기, 자신의 속한 의료계에 내재한 뿌리깊은 인종차별의 흔적을 신앙의 모습으로 극복하려는 백인 남성 의료인, 교회에까지 뿌리 내린 인종차별의 모습을 극복하고 화해를 이루는 것에 대한 이야기, 뿌리깊은 갈등과 상처에도 평화를 이루어 가는 것에 대한 이야기.
어떻게 보면 수년 전에 흘러 넘치던 간증집과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보이지만, 이 책의 대부분의 이야기는 완료형이 아니라 진행형이다. 인종차별의 문제는 트럼프 시대에 들어서면서 더 그 깊은 뿌리를 드러내었다.
인종차별의 문제이기에 어쩌면 한국에 사는 우리들에게 당면한 문제들과는 거리가 멀어보일 수 있다. 하지만 여러 다른 이슈들을 ‘인종차별’의 자리에 대입해 봄으로써 상당히 많은 생각거리를 얻을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의 프롤로그는 이 책의 방향을 정의하며, 이 책의 에필로그는 이 책에 대한 가장 훌륭한 요약이며 서평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차이를 넘어 손을 내밀까? 어떻게 하면 세상에 아무렇지도 않게 섞이지 않고 우리의 구별됨을 유지할까? 방어적으로 움츠러들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섬길 방법은 무엇일까? 우리는 이 책의 이야기들이 앞으로 나아갈 길을 보여주는 데 도움이 된다고 믿는다. 그 길의 출발점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누구인지 알고 “겸손하고 부드러우며 인내와 사랑으로 서로 너그럽게 대하” (엡4:2, 현대인의 성경)며 사는 것이다” (에필로그 마지막 문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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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란노는 계속 팀 켈러 목사의 책을 내고 있다. 팀 켈러는 미국에서는 상당히 보수적인 진영의 목사로 여겨지겠지만, 한국에서는? 그의 모든 얘기들을 한국의 일반적인 개신교 교회들이 다 받아들이기는 힘들 것 같다. 특히 온누리는. 그럼에도 두란노에서 이렇게 책을 몰아서 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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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팬데믹 – 톰 라이트 (인용문 모음)

하나님과 팬데믹 – 톰 라이트, 이지혜, 비아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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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야 말로, 사람들이 우상숭배와 불의와 모든 악의에서 돌이켜야 하는 이유다. 십자가는 세상의 모든 고통과 공포를 쌓아 처리한 곳이다. 부활은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와 그분의 주권적인 구원 통치의 출발점이다. 이 일이 예수님의 몸의 부활과 함께 시작된다. 이 사건들이야 말로 회개하라는 유일한 요청이요, 하나님이 세상에서 하고 계신 일에 대한 유일한 실마리다.

복음 이야기를 살피지 않고 지진이나 쓰나미, 전염병 등에서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고 계시는지’에 대한 결론으로 비약하는 것은, 예수님을 배제한 채 하나님에 대해 무언가를 추론하려는 기초적인 신학적인 실수를 범하는 것이다. (p49)

이제부터는, 회개하라는 요청과 하나님나라가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진다는 선언은 전쟁이나 지진, 기근이나 전염병 (또는 집 안에서 당한 사고)를 통해 오지 않는다. 예수님을 통해 온다. 예수님이 말씀하고 가르치고 선포하신 예수님의 이야기를 통해 온다. 하나님이 우리가 세상을 경영하는 잘못된 방식을 경고하기를 원하신다면 – 내가 보기에는 그럴 가능성이 상당히 크다 – 그 경고는 예수님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올 것이다. (p51)

인류 역사 내내 새로운 비극이 생길 때 마다 이 질문이 사람들의 귓가를 울린다. 하나님은 왜 이 사태를 내버려 두셨을가? 왜 개입해서 멈추지 않으셨을까?

예수님은 날 때부터 못 보는 사람이 과거를 돌아보시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를 비난했지만, 그분은 아무도 비난하지 않는다. 하나님 아버지를 믿고, 지금 필요한 일을 알기 위해 앞을 내다보신다. 그리고 그 목표로 가는 길이 눈물이다.  성육신하여 나사렛 에수가 되셨다고 요한이 말해 주는 하나님이, 곧 육신이 되신 말씀, 친구의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리시는 하나님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르다와 마리아와 거기 모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반응하시는가? 그분은 상황을 역전시켜서 그들의 죄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이제 회개해야 한다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그저 눈물을 흘리실 뿐이다. 그리고 그 눈물과 믿음에서 비롯된 권위로, 나사로에게 무덤에서 나오라고 명령하신다. 유행병은 물론이고, 그에 수반된 온갖 사회/문화적 격변을 마주한 현 상황에 필요한 말씀이 있다면 바로 여기 있는 말씀이 아닐까 싶다. (p57~58)

사도행전 11장에는 예루살렘 북쪽으로 500킬로미터쯤 떨어진 시리아 안디옥에 있는 교회가 등장한다. 예루살렘에서 바나바가 와서 하나님의 은혜가 확실히 역사하는 것을 확인하고 기뻐한다. (행11:23) 바나바는 사울을 찾아 데려와서 가르치고 전파하는 사역을 돕게 한다. 이 무렵에 순회 에언자 몇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내려왔다. 그들 중에 아가보라는 사람이 일어나서 성령이 그에게 계시한 내용을 모인 사람들에게 전했다. 온 세계에 큰 기근이 들것이라는 예언이었다.

그러자 안디옥에서 예수님을 따르던 이들은 무엇이라 말했는가? “주님이 곧 다시 오신다는 표적이 틀림없어”라거나 “우리가 죄를 지었으니 회개해야 한다는 뜻이야”, “모든 사람이 죄인이나 회개해야 한다고 온세상에 전할 좋은 기회야”라고 말하지 않는다. 서로 책임을 전가하지도 않는다.

이런 단순한 질문을 던질 뿐이다. 이런 일이 생기면 누가 가장 위험에 처하는가? 그들을 돕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나? 누구를 보내야 할까?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가장 큰 원리 중의 하나, 예수님을 통해 시작된 하나님나라는 창조세계를 원래 모습대로 회복하는 것이라는 원리를 만난다. 하나님은 항상 충성된 인류를 통해 창조세계에서 일하고자 하셨다. (세계 역사에서 그 이전에는, 한 도시의 다문화 집단이 500킬로미터 떨어진 다른 도시의 단일 문화 집단에 형제의 의무를 느낀 적이 없었다.)  (p65~66)

처음부터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이 사랑하는 백성 이스라엘을 바라보셨듯이 세상을 바라보고,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는 말씀과 행동을 찾아, 기도하면서 그 말을 하고 그 행동을 실천했다. 이것이 바로 ‘선교’가 뜻하는 바다. (p68)

이 바이러스는 수많은 인명을 앗아 가고 있을 뿐 아니라, 친구나 돕는 손길 없이 격리된 사람들, 폭력적인 동반자를 둔 사람들, 며칠 동안 집에 갇혀 지내 우울함에 빠진 사람들 등 훨씬 더 많은 사람에게 스트레스와 괴로움으로 피해를 주고 있다. 그런 사정은 우리도 잘 안다. 교회는 이 상황에서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앞서 살펴보았듯이, 어떤 사람들은 교회가 옆에서 지켜보면서 조언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모든 사태의 원인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기 때문이다! 종말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우리가 현 상황을 잘 파악하고 있으니 어떻게 해야 할지 알려 주겠다! 하지만 바울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롬 8:22 ~ 27) 바울은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도 똑같은 “신음”에 빠져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자신의 현재 모습(약하고 혼란스럽고 부패하기 쉬운)과 앞으로 될 모습(영광스럽고 새롭고 영원한 몸으로 부활할) 사이의 엄청난 간격을 고통스럽게 인지하고 있다. 동시에 이것은 우리가 창조세계의 신음을 공유한다는 의미다.

지금 교회는 무엇보다 기도해야 한다. 하지만 이 기도는 참으로 이상한 기도다. 우리는 성경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장의 중심에 있는데(로마서 8장), 여기서 바울은 우리는 기도해야 할 때 마땅히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모르지만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어쩔 줄 모르고 있다! 하지만 그는 우리가 이를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고 암시한다. 자연스러운 상태라는 것이다.

이때가 바로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내밀한 삶에 사로잡히는 순간이다. 이 모든 상황에서 우리가 아는 한 가지는, ‘알지 못하는’ 것이 지극히 정상적인 상태라는 것이다.

우리가 ‘신음하면서’ 무슨 말이나 행동을 해야 할지 모르는 바로 그때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도 말없이 ‘신음하고’ 계신 것을 알게 된다. (p82~83)

늘 큰소리를 치던 베드로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예수님은 승자가 되시고, 베드로는 그분을 위해 싸워야 하는데 말이다!(요 13:6-10, 37-38) 교회는 늘 베드로의 유혹을 만난다. 필요하다면 싸워서라도, 세상을 ‘평범한’ 방식으로 운영하려는 유혹 말이다. 하지만 문제가 닥치면 심하게 넘어져 움직이지 못한다.

그러면 우리는 무슨 말을 해야 하는가?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는 그저 할 말이 없는 정도, ‘이 상황이 무슨 뜻인지’ 온 세상에 큰 소리로 선포할 말이 없는 정도가 아니다(물론 세상도 우리에게서 무슨 말을 듣겠다고 간절히 기다리고 있지는 않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도 창조세계의 신음에 사로잡혀 있다. 동시에, 성령 하나님도 우리 안에서 신음하고 계심을 깨닫는다. 기도하는 것, 고통 받는 세상에서 말없이 기도하는 것, 이것이 우리 소명이다. 무슨 말을 해보려고 해도 흐느낌이나 눈물만 흐를 때는, 성령 하나님이 창조세계의 고통 가운데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스스로 되새겨야 한다. (p84~85)

하나님은 그들을(‘하나님의 목적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 고통받는 세상에 대한 그분의 구원계획의 일부로 ‘부르셨다.’ 이때 신자들은 탄식을 표현할 단어를 찾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들에게는 여전히 해야할 일이 있다. 사람들을 치유하고, 가르치고,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고, 위로해야 한다. 이런 일들은 모두 탄식에서 비롯된다. 안디옥 교회처럼, 우리도 ‘왜’를 말할 수 없을지는 몰라도, 희미하게 나마 ‘무엇’을 찾을 수 있다. 누가 위기에 처해 있는가? 무슨 일을 할 수 있는가? 누구를 보낼 것인가? (p92)

하나님의 백성은 그저 구경꾼이나 수혜자가 아니라 적극적인 참여자다. 그들은 “하나님의 목적대로 부르심을 받았다.” 하나님은 지금도 세상 고통의 한복판에서, 성령의 사역을 위한 도구로 그들의 신음을 사용하시기 때문이다. 성령은 그 슬픔을 아버지 앞에 두시고, 다양한 치유와 소망의 사역을 위한 배경을 만드신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아들의 형상대로 빚어진다. 십자가의 모양으로, 하나님의 정의와 자비, 언약과 창조세계에 대한 그분의 신실하심이 눈물과 고통, 탄식과 산고를 통해 세상 앞에 드러난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붙들어야 할 소명이다. (p93)

지금 당장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도전적인 순간에 바로 궁정의 요셉처럼 일할 수 있는 사람, 상황을 분석하고 어떻게 대처애야 하는지 비전을 그려 줄 사람이다. 정치인과 같은 현명한 리더십을 지니면서도, 앞으로 몇 달 동안 닥칠 도전들을 비전과 현실주의를 겸비하여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과 나란히 자리를 잡고 기도하는 그리스도인 지도자들이 필요하다. (P130)

교회와 국가 지도자들을 지켜보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우리는, 이 탄식의 시기를 기도와 소망의 시간으로 활용해야 한다. 이집트의 요셉처럼, 상처입은 하나님의 세상 전반에 창의적이고 치유하는 정책과 행동을 불러올 현명한 인간 지도력과 주도권을 소망해야 한다. (p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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花も(꽃들도, Flowers)

花も(꽃들도, Flowers)

– 1절 –

ここにいずみはわく  涙をすぎるとき

코코니 이즈미와 와쿠  나미다오 스기루 토키

이곳에 생명샘 솟아나 눈물골짝 지나갈 때에

やがて実を結び  笑い声に満ちる

야가테 미오 무스비  와라이고에니 미치루

머잖아 열매 맺히고 웃음소리 넘쳐나리라

꽃들도 구름도 바람도 넓은 바다도

찬양하라 찬양하라 예수를

하늘을 울리며 노래해 나의 영혼아

은혜의 주 은혜의 주 은혜의 주

– 2절 –

あおげ天はひらき  僕らは見るだろう

아오게 텐와 히라키 보쿠라와 미루다로우

그날에 하늘이 열리고 모든 이가 보게 되리라

やがて花は咲き  栄光の主が来られる

야가테 하나와 사키  에이코우노 슈가 코라레루

마침내 꽃들이 피고  영광의 주가 오시리라

<후렴>

花も雲も風も大海も 

하나모 쿠모모 카제모 오오우미모

꽃들도 구름도 바람도 넓은 바다도

かなでようかなでよう  イエスを

카나데요우 카나데요우 이에스오

찬양하라 찬양하라 예수를

空にひびけ  歌え魂よ

소라니 히비케 우타에타마시이요

하늘을 울리며 노래해 나의 영혼아

恵みを恵みを恵みを

메구미오 메구미오 메구미오

은혜의 주 은혜의 주 은혜의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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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2022 앞으로 3년, 투자의 미래 – 김영익, 강흥보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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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2022 앞으로 3년, 투자의 미래 – 김영익, 강흥보

서강대 경제대학원의 김영익 교수와 기술분석 전문가인 강흥보 님의 이 책은 앞으로 곧 경제위기가 닥칠 것임을 예상합니다.  이러한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투자의 패러다임과 전략에 대해서, 그리고 한국 경제가 저성장의 벽을 깨고 재도약을 하기 위한 제안을 담고 있습니다.

이 책이 출간된 시점이 2019년 10월인데, 이미 이 책의 예상한 위기의 시점은 맞지 않게 되었습니다. 2019년 하반기 이후 글로벌 경기 침체가 이어질 거라 보았는데, 2020년 1월말까지 전세계 경기는 코로나19 바이러스에도 불구하고 좋은 신호들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이 책이 제시한 위기 요인이 사라졌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번엔 다르다’라는 말이 위기 전에 늘 되풀이 되었던 과거를 기억한다면, 명백한 위기 요인이 저절로 사라지지는 않을 거라는 것이 명백합니다.

일단 이 책은 앞부분에 위기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전망합니다.

가장 주요한 위기 요인은 2008년 금융위기가 남긴 거대한 부채입니다. 주요 국가에서 정부 부채와 기업 부채가 증가했습니다. 중국의 경우 2008년 GDP의 96%였던 기업 부채가 2018년 152%로 급증했습니다. 한국은 가계 부채가 2008년 GDP의 74%에서 2018년 98%로 증가했습니다.

경제위기 극복과정에서 초저금리와 풍부한 유동성으로 인해 자산 가격에 생긴 거품은 이제 곧 빠질 것으로 전망합니다.  이 책은 그 시점을 2019년 하반기로 잡고 있습니다. 2020년 2월 현재 아직 거품은 지속되고 있습니다. 이 책의 기본 논지는 2008년 경제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재정과 통화 정책이라는 무기를 다 써버렸기에 새로운 위기가 닥친다면 이제 과거와 같은 정책을 쓸 여력이 없다는 점입니다. 결국 임박한 경제위기는 2008년 당시보다 더 깊을 뿐더러 극복하는 데도 더 오래 걸릴것이라고 전망합니다.

맥킨지가 2019년 7월에 낸 보고서에 의하면 아시아 국가들이 금융위기를 겪을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기업의 이자 보상 배율이 낮은 기업들이 높아지고 있고, 아시아 금융회사들의 수익성이 낮아지고 있다고 합니다. 글로벌 자금 흐름이 최근 과도하게 아시아에 집중되고 있다는 점도 위기에 취약하게 만드는 요소입니다.

이러한 위기가 닥치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먼저 97년 외환위기가 어떻게 숨은 기회였는지를 얘기합니다. 저성장저금리 시대이기에 투자를 해야만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일반적인 위기 대응전략 한가지를 제시합니다. 글로벌경기 침체가 진행되는 동안 정액적립식으로 꾸준히 투자하라고 합니다. 중국 지수 ETF 60%, 미국 지수 ETF 20%, 코스피 지수 ETF 10%, 코스닥  지수 ETF 10% 정도면 높은 수익을 실현하는데 유리하다고 추천합니다.

글로벌 경제 침체 상황에서 한국 증시에서의 투자 전략은 저점 대비 5% 상승한 지점에서의 정액 적립식 투자입니다. 삼성전자가 3만원대로 떨어지면 매월 적금 붓듯이 꾸준히 매수하라고 합니다. 한국 기업의 배당성향이 높아질 것을 전망하여 고배당 주식이나, 배당형펀드, 배당형  ETF를 또한 추천합니다. 반면에 인구 변화에 따른 수요 변화, 정부정책, 금융 시장 동향 등을 고려할 때 부동산 비중은 줄일 것을 추천하고 있습니다. 특이하게도 비트코인에 대해서도 분산투자할 것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경기침체를 예고해주는 가장 중요한 지표는 장단기 금리차 역전현상입니다. 2019년 5월 3개월 국채 수익률이 10년 국채수익률보다 높아지는 역전 현상이 발생했습니다. 1978년 이후 이러 현상은 5번 발생했는데, 5번 모두 2년 이내에 경기가 침체되었다 합니다. 2년이면 너무 긴거 아닌가, 이게 무슨 선행지표인가 싶기도 하지만, 현재 사상최고를 몇주째 찍고 있는 주가 지수가 부채 기반 유동성으로 인한 버블이 아니라고 할 수 없기에 계속 불안감을 주는 것은 사실입니다.

중국에 대해서는 부채와 투자 중심의 시장에서 소비 중심으로 이동하는 과정에 위기와 진통을 일으킬 것으로 전망합니다. 기업부채가 증가한 상황에서 경제성장률이 낮아지면 기업에 대한 구조조정이 필요해집니다. 이 과정에서 경제 침체와 주가 급락이 예상되지만, 향후 소비 중심 경제에서 안정 성장할 수 있는 내수 1등 기업의 주식을 싸게 매입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 하며 상하이 종합지수는 어떤 글로벌 증시보다 유망한 투자처가 될 것으로 전망합니다. (그 시기는 2020년 중반기 이후라 하지만, 이미 위기의 시작 시점이 달라졌기에 시기에 대한 전망은 의미가 없는 상황입니다. )

세계적인 환율 전쟁으로 이해 미국,  EU, 일본 모두 통화량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장기적으로 달러가치는 하락하겠지만, 위안화는 다소 상승할 것으로 예상합니다. (2019년 달러당 7위안은 민감한 숫자였습니다.) 원달러 환율도 역시 계속 내려갈 것으로 보입니다. 달러보다는 금이 더 투자할 가치가 있다고 하며 온스당 1800달러를 넘어서 2000달러까지 상승할 것을 전망하고 있습니다. (현재 대략 온스당 1500~1600달러 입니다.)

미국 증시가 사상 최고점을 몇주간 갱신하고, 미중 무역 전쟁이 휴전 상태로 접어들고, 브렉시트 불확실성도 해소된 상태에서 몇가지 선행지수들이 좋게 나오면서 코로나19 바이러스만 아니면 경기는 좋아지는 방향이라고도 합니다. 하지만 위기 요인들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아직도 공급되고 있는 유동성이 제공하는 ‘뉴 노멀’ 때문일까요. ‘이번엔 다르다’라는 말은 2008년에도 되풀이 되었었습니다. 사상 최고점 갱신이 얼마나 계속될 수는 없을 것이기에 다소 불안불안한 요즈음입니다.

위기의 발생 시점에 대해서는 이미 틀렸지만, 이 책에 리스트 되어 있는 위기 예측의 논리와 대응 투자 전략은 귀담아 들을만 하다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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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2월 요한복음 6장

01.20 요한복음 6:1~15

때는 유월절 무렵이라 합니다. 요한복음에서의 두번째 유월절입니다. 첫번째 유월절에서는 예수님이 성전에서 상인들을 몰아내셨었죠. 이번에는 갈릴리 바다 입니다. 유월절은 출애굽기 때 있었던 일을 기억하는 절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시고, 광야에서 만나로 먹이시던 때 입니다.

요한복음의 두번째 유월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던 무리를 먹이는 표적을 행하십니다. 앞에서도 나왔던 빌립과 안드레가 등장합니다. 빌립은 계산에는 빨랐지만, 예수님의 마음은 짐작하지 못했습니다. 안드레는 자신의 계산일랑은 미뤄 놓고, 혹시나 하고 소년과 같이 예수님 앞에 나아갑니다.

우리 앞의 작은 것을 내어드릴 때 예수님이 어떻게 새롭고 놀라운 일을 행하실지 우리는 짐작조차 못할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의 계산으로 벌어질 일을 미리 예단하기 보다는 하나님이 일하실 여지를 우리의 마음 가운데 남겨 두고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표적을 본 군중들은 예수님을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고 호칭합니다. 그들의 마음에서 ‘그 선지자’는 곧 ‘임금’, 강력한 왕이었습니다. 그들이 억지로 붙잡을 줄을 안 예수님은 홀로 산으로 떠나가십니다.

오천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예수님 가까이 있었고, 예수님을 붙잡으려는 마음이 있었는데, 예수님은 어떻게 해서 인지 ‘홀로’ 떠나가십니다. 그 많은 사람들, 자신을 인정하고 세우려는 그 모든 마음을 뒤로 하고 홀로 떠나가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어떻게 헤아릴 수 있을까 싶습니다.

하나님을 따른다 하면서 사람의 인정을 더 구하는 모습을 많이 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그 길은 사람의 인정과는 거리가 먼 일이겠습니다. 무엇이 그 길인지 분별할 수 있는 지혜와 따를 수 있는 용기를 허락해 주시길 기원합니다.

 

01.21 요한복음 6:16~21

어제 본문에서 예수님은 홀로 산으로 떠나셨습니다. 아마 하나님과 독대하는 시간을 가지셨겠지요. 병행 본문인 마태복음 14:23에서는 ‘기도하러’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기다리지 않고 배를 타고 돌아가려 합니다. 왜 자기들끼리만 돌아가려 했는지 이해는 안 가지만 아마도 예수님이 ‘먼저 돌아가라’라고 하셨을 수도 있겠습니다. 배는 해가 저물 때 출발했는데, 어두웠을 때 큰 바람이 불고 파도가 거칠어지기 시작합니다. 돌아가려고 했던 가버나움 까지는 약 11킬로미터의 여정인데, 대략 반 정도인 5킬로미터 정도 왔을 무렵이라 합니다. 본문에는 ‘십여 리’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근데 예수님은 홀로 해변을 따라 그 거리를 걸어오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아마 그래서 ‘먼저 가라’라고 말씀하셨을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병행본문인 마가복음 6:48절에 보면 ‘제자들이 힘겹게 노 젓는 것을 보시고’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일반적인 사람의 가시거리에 계셨기에 ‘보시고’라는 표현을 썼을 것 같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그냥 ‘아시고’라고 표현을 했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전 까지는 철저히 인간의 육체 가운데 임하신 하나님이었습니다. 물 위를 걸으시지만, 배 위로 순간이동 하지는 않으십니다. ‘홀로 뭍에 계시다가’ (막6:47) 제자들이 힘겨워 하는 것을 보시고 바다 위로 직접 걸어서 오십니다. (막6:48)

예수님은 ‘(바로) 나다. 두려워 하지 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나다’의 헬라어 구문이 ‘에고 에이미’라 합니다.

유월절은 ‘출애굽’ 때를 기억하는 절기입니다. 어제 본문에서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을 먹이셨는데, 이와 병행하는 사건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이신 사건일 겁니다. 이러한 배치는 사도 요한의 의도라고 여겨지고 있습니다. 풍랑 가운데 제자들에게 직접 오신 예수님의 모습은 파라오의 군대에 쫓겼을 때, 홍해 바다가 열렸던 역사 가운데 함께 하셨던 하나님을 제자들에게, 또는 요한복음의 독자들에게 연상케 하였을 수 있습니다.

시편 77편 16절은 ‘하나님이여 물들이 주를 보았나이다. 물들이 주를 보고 두려워하면 깊음도 진동하였고’ 라고 찬양합니다. 이 시편은 홍해 사건에 대한 찬양입니다. 시편 77편 20절은 ‘주의 백성을 양 떼 같이 모레와 아론의 손으로 인도하셨나이다’라고 합니다. 홍해 사건과 만나 사건의 공통적인 주인공은 모세와 아론입니다. 군중들이 말했던 ‘그 선지자’로서의 예수님의 이미지와 겹쳐집니다.

출애굽은 이집트의 압제로부터의 구원이었습니다. 그럼 무엇으로의, 무엇을 향한 구원이었을까요?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선민으로 택하신 하나님의 구원은 무엇을 향한 구원이었을까요? 왜 이스라엘은 그러한 하나님의 이상에 이르지 못했을까요? 예수님이 이루실 하나님 나라는 과거의 이스라엘의 모습과는 단절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무리들은 과거의 이스라엘을 재현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길은 사람들의 길과는 달라질 수 바께 없습니다. 모세와 아론의 이미지와 겹칠 지언정 이끄는 방향은 차츰 달라질 수 밖에 없겠습니다.

어쨌든, 이 본문은 누가 이 세상의 참 주인인가를 또한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람과 파도까지도 순종하는 주님은 이미 홍해를 여실 때도 그러함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때, 정작 두려움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우리를 힘들게 하는 그 상황의 것이라는 것을 우린 알아야겠습니다. ‘바로 나다 (에고 에이미)’하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이 이미 우리에게 임했음을 믿어야겠습니다.

Do not tell God how big your storm is. Tell the storm how big your God is.

01.22 요한복음 6:22~29

‘무리’는 예수님이 분명히 배를 안 탔음에도 바다 건너편에 와 계신 것을 보고 놀라서 묻습니다. 사람의 깊은 속을 보시는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 깊은 곳의 생각을 아십니다. 표적이 가리키는 바를 제대로 알아서가 아니라, 자신의 필요를 채웠기 때문에 예수님을 찾는 것임을 꿰뚫어 보십니다.

27절의 뭔가 복잡한 말씀 가운데서 예수님이 결국 하시고 싶으신 말씀은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라는 선언일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누구인가’ 보다 ‘무엇을 해라’라는 말씀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라는 것은 흘려 들은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라면서 마치 무언가를 행해야 하는데 그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처럼 말합니다.

예수님은 다시 말씀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거듭 말씀하십니다. 에수님은 참으로 답답하셨을 것 같습니다.  ‘율법의 준수’라는 ‘행함’이 가장 중요한 것으로 이미 고정관념이 박혀 있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믿는 것’이란 게 무엇인지 와 닿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행함’이 결코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닐 겁니다. 예수님도 그 중요성을 가벼이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예수님을 믿는 믿음 없이, 하나님을 올바로 아는 믿음 없이 이루어지는 ‘율법 준수’의 ‘행함’은 자신을 질식하게 하고 다른 사람을 쉽게 정죄하는 도구가 되곤 했습니다.

다른 무엇 보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올바로 인식하고, 그 분의 선포를 받아들이는 믿음이 먼저일 것입니다.

01.23 요한복음 6:30~40

오병이어의 기적을 직접 경험했거나 전해들었을 것임에도 그들은 무슨 표적을 행하느냐고 묻습니다. 그러면서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음’을 이야기 합니다.

그들은 아주 단단히 오해하고 있습니다. 만나가 내려온 것이 모세가 행한 표적이었다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를 돌이켜 보면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금방 기억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표적을 구하는 자와 직접 표적을 행하시는 존재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오해를 올바로 잡아주십니다. 모세가 떡을 준 것이 아니라고 하시면서 이어서 ‘하나님께서 참 떡을 주신다. 참 생명을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얘기는 6:59절에 의하면 가버나움의 회당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유대의 지도자들이 구약을 제대로 기억하고 있지 못할 정도라니, 신기하기까지 합니다. 그 시대에 많은 유대인들이 바랐던 바는 이스라엘 왕국의 회복이었고, 강력한 리더를 바랬던 것 같습니다. 심지어 만나 이야기 까지 모세를 표적의 주인공으로 기억하고 있을 정도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들의 바램은 너무 강해서, 예수님을 보고도 그 표적을 보고도 자기가 바라던 방향이 아니면 믿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보고서 비교할 수 없는 존재인 인간 모세와 비교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끈기 있게 말씀하십니다.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 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그러니 ‘나를 믿어라.’

표적이 가리키는 바는 세상 주관자이신 창조주 하나님이 이제 눈 앞에 나타나셨다는 것과, 그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일텐데, 당시 유대인은 받아들이기 어려워 합니다.

하나님의 신실한 언약은 오늘의 우리에까지 이어져 내려옵니다. 우리의 바램을 투영하는게 아닌, 하나님의 뜻을 순전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정결한 마음을 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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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2월 요한복음 5장

01.15 요한복음 5:1~9

이 본문에서 3절후반에서 4절은 무시하고 읽는게 맞다고 합니다. 첫째, 가장 오래된 사본들에는 이 구절이 나타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둘째, 요한이 다른 곳에서는 사용하지 않은 헬라어 표현이 7개나 있다고 합니다. 사실 내용상으로도 유대교 전통이라기에도 이상한 측면이 있습니다. 이방 종교의 풍습이라고 하면 ‘천사’라는 단어 대신 그 종교의 단어를 쓰는게 맞겠지요.

병도 오래되다 보니, 병자의 마음도 한 곳에만 쏠려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낫고자 하느냐’고 묻는데, 병자의 대답은 엉뚱합니다. 못에 들어가는게 목적이 아니라 낫는게 목적인데 뭔가 답이 어색합니다. ‘낫기 위해서는 못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만 38년 동안 마음에 새기고 있었기 때문에 누가 물어도 ‘못에 들어가고 싶다’는 말만 했을 것 같습니다. 결정적으로 병자는 눈 앞의 사람이 누구인지 몰라보았기에 예수님에게도 늘 해오던 대로 그렇게 답을 한 것이겠습니다.

예수님은 명령 한 마디로 그 환자의 병을 고칩니다. 신기한 것은 그 환자가 일어나 가버렸다는 점입니다. 고맙다는 말을 했다는 흔적도 전혀 없습니다. 본인에게 닥친 일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되었었나 봅니다. 어쩌면 그 병자도 안식일이었음을 인지하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명령을 받아들이자니 안식일을 어기는 것일 테고, 안 받아들이자니 38년간의 세월이 무겁습니다. 빨리 그 자리에서 달아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베데스다 연못은 3절과 4절같이 가필되었을 것으로 의심되는 구절에서와 같이 유대교 전통이 아닌 이방 풍습이 이미 오랫동안 자리잡았던 곳이었을 수 있습니다. 요한이 예루살렘에서의 여러 표적들 가운데 이 사건을 기록한 것의 의미는 이방 풍습을 넘어서는, 또한 이방에게도 선포하는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을 보여주는 사건이어서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제 요한은 ‘표적’이란 단어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병자의 모습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사람들은 받아들일 준비가 안된 상태에서 원래 믿어왔던 패턴 그대로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로 살아가고 있었고 그 관성은 예수님을 몰라 보게 합니다. 어쩌다 예수님이 주신 축복 또한 귀한 줄 모르고 행동하게 됩니다.

이는 저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예수의 메시아 되심, 그 분이 행하신 일로 인해 감사할 줄 아는 하루 되길 기도합니다.

 

01.16 요한복음 5:10~18

이 본문에 나오는 유대인들은 참 묘한 특징을 지녔습니다. 38년을 병을 앓던 환자가 일어난 것에 대한 놀람이 없이 ‘안식일에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의 잘못됨을 먼저 지적합니다. 눈 앞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역사에는 눈을 감고, 먼 옛날의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정확히는 율법 자체라기 보다는 실천조항 같은 것이겠지요. 율법의 근본정신 보다는 외형에만 관심이있어 보입니다.

이 고침을 받은 사람도 참 신기합니다. 38년만에 자리에서 일어났음에도 전혀 감사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는 자기를 고친 사람이 누군지 알았을 때, 감사하기 보다 유대인에게 일부러 가서 누구였는지 밝힙니다.

이제 예수님에 대한 ‘유대인’들의 박해가 시작됩니다. ‘유대인’이란 표현이 어색합니다. 예수님과 그 모든 제자들도 어차피 유대인이었으니까요. 바로 앞 장면에서 사마리아 지방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의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선명했습니다. 일단 이 대목에서 ‘유대인’이라 함은 ‘유대인’들 중에서도 안식일을 이유로 예수님을 박해하고 고발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겠습니다.

안식일에 일을 했다 하여 그 유대인들이 뭐라하니까, 예수님이 잘 알려진 말씀을 하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하시는 일을 구분하자면,  창세기 첫 엿새 동안의 하나님의 일을 ‘창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안식 후의 하나님의 일을 ‘섭리’라고 하기도 하고, ‘지속적 창조’라고 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어떤 방향을 향해서 이루어지고 있을까요? 어떤 목적을 이루시려는 것일까요? 그것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이 땅에 내려올 새 예루살렘, 즉 새 창조를 향해서일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이러한 의미를 전혀 알 수 없었습니다. 그저 과거의 율법의 규정에 얽매여서 예수님을 더 박해하게 됩니다.

과거의 관성에 사로 잡혀 있을 때, 하나님이 이루어 가시는 ‘지속적 창조’,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 알아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세상은 과거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변화하고 있고, 하나님의 역사는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의 주인임을 인정할 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관점도 종교개혁 시대 보다는 더 새로와져야할 것입니다. 그럴 수록 말씀이 주어진 그때 그곳의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알게 하신 바가 무엇인지 더욱 정확하게 파악하고, 오늘날에 그 말씀들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새롭게 하나님께 구하려는 지혜가 필요할 것입니다.

오늘날의 한국 교회의 모습은 과거의 유대인이나 38년된 병자나 다를 바 없어 보여서 안타깝습니다. 말씀에 대한 인간의 전통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 자체를 더 깊이 파고들어가는 열정이 아쉬운 시대입니다.

요한복음 5: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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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2월 요한복음 4장

01.11 요한복음 4:1~14

예수님은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를 통과하십니다. 본래 사마리아인과 유대인은 역사적으로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유대인이 사마리아 땅을 통과하는 일은 드문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표현이 재미있습니다. ‘통과하여야겠는지라’  ‘It was necessary for him’. 이 일은 예수님에게는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이 길을 선택하신 것이겠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기 위해서지요. 유대인 중에서는 제자들을 세우시고 니고데모를 만나신 다음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십니다. 여인에게 어떤 말씀을 전하시고, 그 여인으로 하여금 그 말씀에 대해 증언을 할 수 있게끔이겠습니다.

예수님이 사용하시는 ‘생수’라는 단어는 ‘living water’로서 흐르는 물을 가리키는 당시의 표현이라 합니다. 흥미롭게도 ‘생명의 물’의 의미를 같이 의미하도록 사용하신 것이겠지요.

물이 부족한 건조한 지대라서, 마실 물은 언제나 생존의 문제와 연결되었을 겁니다. 목마름은 그만큼 지금 보다 더 절실했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회복하실 것은 단순한 갈증을 넘어서, 우리를 새 생명으로 회복시키는 것이겠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위한 만남을 예수님은 ‘필요한 일’, ‘해야하는 일’로서 생각하신다는 것이 사실 놀라운 은혜의 시작입니다. 내일 본문에 나오겠지만, 그 사마리아 여인은 매우 부족한 존재였습니다. 그런 부족한 존재를 만나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예수님은 우리 각각의 만남도 그렇게 생각하신다고 봐야겠습니다. 그렇기에 십자가에까지 걸어가실 수 있는 거겠지요.

우리와의 만남을 소중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우리의 마음이 되어야겠습니다.  그때 예수님으로부터의 생명수가 우리 안에도 넘치게 흐를 수 있겠습니다. 갈급한 마음으로 주일의 예배를 준비하는 토요일 저녁 되시길 바랍니다.

01.12 요한복음 4:15~26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는 잘 보면 재미있는 부분이 상당히 많습니다.

예수님이 ‘네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니 ‘남편이 없나이다’라고 간단히 대답합니다. 그냥 같이 살고 있는 그 남자를 불러오지도 않습니다. 얘기하고 싶지 않은 주제로 대화가 이어지는 걸 피하기 위해서 단칼에 잘라버리는 듯한 답변입니다.

하지만,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는 예수님은 여인의 그 대답을 긍정하면서 18절에서 바로 그 여인의 상황을 드러냅니다. 19절에 여인은 놀라고 당황했겠지만, 예수님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 최소한 ‘선지자’는 되나 보다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20절에 ‘예배드리는 산’에 대한 전혀 다른 주제로 건너뛰려고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대화를 새로운 시대의 예배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어디서’ 예배를 드리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너희는 영과 진리로 에배하라’라고 하시면서 다시 ‘너희’로 주제를 가져오십니다.

여인은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주제를 ‘메시아’를 언급하면서 다시 밀어내지만, 이는 예수님이 기다리시던 바였습니다.

자신이 메시아를 만났음을 깨닫게 된 여인은 이제 더 이상 밀어낼 수 없음을,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했음을 직시하게 됩니다. 물동이를 버려두고 뛰어갈 수 밖에 없는 거죠. 사람의 눈길을 피해 한낮에 물을 길러 나왔건만 동네 사람들을 불러올 수 밖에 없는 마음이 되었습니다.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에 직면했을 때에도 예수님께 나아가지 못하게 만드는 여러가지 이유들, 핑계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우리는 예수님께로 돌아갈 수 밖에 없게 됩니다.

 

01.13 요한복음 4:27~42

27절에 보면 예수님과 여인의 대화를 제자들은 듣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28절에 여인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갑니다. 버려둔 물동이는 그만큼 예수님의 이야기를 전해야겠다는 생각이 여인에게 얼마나 소중했는지 보여줍니다. 자신의 직업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나선 제자들의 모습이 생각납니다.

단지 그 뿐이 아니었습니다. 29절에 여인은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에 대해 동네 사람들에게 얘기합니다. 예수님 앞에서는 대화 주제가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것을 기피하던 여인은 이제 동네 사람들에게 ‘자신이 행한 모든 일’을 기억나게 하는 언행을 피하지 않습니다. 단지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증언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동네에서 사람들이 나와 예수께로 나오는 모습을 보신 예수님의 마음은 아마도 기쁨으로 가득했었나 봅니다. 32절부터 38절까지의 예수님의 말씀은 기쁨으로 가득찬 어조를 상상하고 읽으면 딱 어울립니다. 오랫동안 뜻하던 일이 잘 되었을 때, 그 기쁨이 우리를 가득 채울 때, ‘안 먹어도 배부르다’라는 식의 표현을 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기쁨은 그들이 구원을 받았다는 것 뿐 아니라 그 사건이 상징하는 바, 즉 복음이 이제 유대인을 넘어서 사마리아 땅을 거쳐서 온 세계로 퍼져나가는 것이 시작되었다는 것에 대한 기쁨이기도 할 것입니다.

유대인 중에서 제자를 삼았고, 유대 땅에서 세례도 많이 주시기도 하였지만, 이 대목에서의 사마리아인들만큼 명확하게 예수님을 파악한 사람들도 별로 없었습니다. ‘세상의 구주’라는 고백은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고백 이상으로 예수님을 잘 인식한 표현이기도 하면서, 당시의 세상 문화에 대한 강력한 도전을 표현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세상의 구주’는 당시 로마 황제들을 가리키는 표현이었습니다. 시저의 뒤를 계승한 아우구스투스는 지중해 연안 지방의 오랜 분쟁을 끝내고 팍스 로마나의 평화를 시작한 황제로 ‘구세주Savior’라고 불렸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세상의 구조’로 호칭한다는 것은 로마 제국의 세속 질서 보다 높은 권위의 하나님 나라를 인정하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마리아 인들은 어떻게 그런 깊은 인식에 이르렀을까요? 예수님은 38절에 ‘다른 사람들의 노력’을 언급하십니다. 세례 요한과 그 이전의 선지자들까지 포함한 말씀의 오랜 전통이 사마리아인들에게도 남아 있었음을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우리 안에 심어진 말씀들이 그때 그때는 잘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어느 순간 하나님의 지혜가 우리에게 임할 때, 그 모든 이해되지 않던 부분들이 한 번에 연결되면서 서로 뜻이 통할 때가 있습니다. 심는 것 물 주는 것은 인간이 하기도 하지만,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까요. 사마리아인에게 오래 전에 뿌려졌던 말씀의 씨앗은 이제 예수님을 목격했을 때, 그 모든 말씀이 세상의 구주이신 메시아에 대해서 증언하는 것이었음을 깨닫게 하였습니다.

주변에 말씀의 소망을 전하는 사람으로 살고 있는지 돌아 봅니다. 예수님의 큰 기쁨에 동참하는 순간이 내 삶에도 찾아오길 소망합니다.

01.14 요한복음 4:43~54

사마리아 땅에서 이틀을 머무신 예수님은 갈릴리 땅으로 향해 떠납니다. 4:44절 ‘선지가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라고 하시는 것은 1:11절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를 연상시킵니다. 44절에 갈릴리인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지만, 예수님은 그 영접이 참된 영접이 아니라고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 48절에 예수님의 그러한 마음이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표적은 무언가를 가리키기 위한 것입니다.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개탄하시는 바는 사람들이 표적만을 바라보고, 표적이 가리키는 바를 깨닫지 못하는데 있습니다.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에 행하신 두 번째 표적'(54절)을 사도 요한이 기록한 데는 그러한 문제를 대조적으로 드러내기 위함이었을 것 같습니다.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에 행하신 첫 번째 표적은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독자들이 두 번째라고 하면 다 알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나 봅니다.)

‘왕의 신하’가 누구인지 어느 왕의 신하인지, (제일 중요한) 어느 민족인지 얘기가 전혀 없습니다. 유대인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에게는 어쩌면 자명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어쩌면 사도 요한은 그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놀랍게도 이 신하는 예수님의 선포 만으로 믿고 돌아갑니다. (50절)

무언가를 보고 놀라며 계속 그것을 바라면서 믿는다고 말하는 것과 예수님의 말씀의 능력 그 자체를 신뢰하며 다음 행동으로 옮겨가는 것의 구별이 요한 복음에서는 중요하게 다루어 지는 주제라 합니다.

믿고 돌아갔던 그 신하처럼 주신 그 말씀 자체로 신뢰하며 의지하는 모습을 예수님은 원하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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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2월 요한복음 3장

 

01.08 요한복음 3:1~8

니고데모는 상당히 긍정적으로 묘사되는 유대인의 지도자입니다. 그는 조심스럽게 밤에 예수님을 찾아오고, 예수님을 폄하하지 않고 (성전에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네가’로 표현합니다.) ‘랍비여’ (2절)라고 호칭합니다. 물론 이 호칭은 예수님에 대한 이해가 불충분하다는 것을 보여주긴 하지만, 니고데모가 겸손하고 온유한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총 세번에 걸쳐서(3, 5, 11절) 니고데모에게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가만히 살펴보면 예수님의 말씀은 니고데모가 한 말과 상관없습니다. 2절에서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높이는 얘기를 하지만, 예수님은 들은 척도 하지 않으십니다. 1장 24, 25절을 생각나게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어쩌면 니고데모의 마음 깊숙히 가지고 있던 질문에 대한 답변이었을 겁니다.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 (25절)

예수님은 전혀 다른 주제인 ‘사람이 거듭나지(또는 위로부터)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3절)라고 말씀 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표현은 요한복음에서는 공관복음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적게 사용됩니다. 바로 뒤에 3장16절의 ‘영생’이란 단어가 여기서의 ‘하나님의 나라’라는 개념과 본질적으로 같은 개념으로 사용되게 됩니다. 마지막 날에 ‘하나님 나라를 본다’라는 것이 ‘영생을 누린다’라는 것과 사실 다르지 않습니다. ‘거듭나다’라는 단어는 ‘위로부터 나다’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위로부터’나다라는 해석이 더 적절해 보이는 것은 바로 뒤이어 ‘물과 성령으로 나다’라는 개념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다시’라기 보다는 ‘하나님으로 인하여’라는 의미가 더 가깝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거듭’이란 의미가 전혀 없어지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다시 새롭게 된다는 의미도 있기 때문입니다.

7절에서 예수님이 ‘놀랍게 여기지 말라’고 하십니다. ‘거듭/위로부터 나다’라는 표현이 새롭기 때문에 니고데모가 놀란 것은 아니었을 겁니다. 구약에도 수없이 반복되는 ‘새롭게 된다’라는 개념을 비유적으로 ‘거듭나다’라고 하는 정도로 놀라지는 않을 겁니다. 니고데모가 놀란 것은 아마도 ‘나 같은 신실한 유대인도!’ 라는 의미에서의 놀람이었을 겁니다. 어찌보면 신앙의 가장 첫 단계인 ‘새롭게 변화함’이 자신에게도 필요하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에 자신의 신앙에 대한 자부심에 상처가 된 것은 아니었나 싶습니다.

니고데모에게도 바리새인들이 인간적인 공로에 연연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예수님은 아시고  8절에서 성령의 역사는 인간이 짐작할 수 없음을 말씀하십니다.

그게 은혜겠지요. 어두운 밤에 조심스럽게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가 마음 깊이 가졌던 갈망을 간파한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더욱 긴 얘기를 들려주십니다. 그건 내일 본문입니다.

 

01.09 요한복음 3:9~21

9절에서 ‘그러한 일’은 ‘거듭/위로부터 남’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일은 사실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이 있고나서야 가능합니다.
12절에서 ‘땅의 일’은 아마도 ‘거듭/위로부터 남’에 대한 얘기일 겁니다. 하늘의 일은 이제부터 예수님이 말씀하시려는 내용이겠구요. 그런데 ‘하늘의 일’을 누가 얘기할 수 있겠습니까? 하늘에 가보지도 못한 일반 사람들이 얘기할 수 있겠습니까? 13절에서 ‘하늘에서 내려온 자’라고 지칭되는 예수님 만이 얘기할 수 있습니다.
14절에서 21절까지는 잘 아는 기독교의 복음이 예수님의 입을 통해서 선포됩니다. 이 선포는 9절의 니고데모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입니다.

요한 복음 3:16절이 유대교 전통에서 벗어나는 부분은 ‘그를 믿는 자마다’라는 구절 때문이기도 합니다. 어떠한 차별도 전제되어 있지 않습니다. 어떠한 출신 성분도 전제되어 있지 않습니다. 모두 하나님 앞에서는 동등합니다. 단지 ‘그를 믿는’ 것 만이 중요합니다.

놋뱀의 비유는 ‘믿음으로 바라보는 것’의 중요성을 얘기합니다. 우리의 시선이 어디에 향하는가에  따라 우리의 삶이 따라 변합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다는 약속. 이게 복음의 시작입니다.

 

01.10 요한복음 3:22~36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니고데모를 만나신 후에 제자들과 함께 ‘유대 땅’에 갔다고 합니다. 예루살렘도 ‘유대 땅’인데 이렇게 표현한 것은 ‘유대 땅’의 다른 지역을 의미하겠지요. 4장에서 보면 갈릴리로 방향으로 길을 잡은 것으로 보입니다.

이 때 세례 요한이 다시 등장합니다. 그가 아직 감옥에 갇히기 전이었으므로 아직 세례를 주며 일관되게 자신은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증언합니다. 그러면서 세례 요한은 결혼식 비유를 통해 예수님을 ‘신랑’으로 호칭합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은 자주 ‘여호와의 신부’로 묘사됩니다. 결혼식 비유를 통해 세례 요한은 예수가 이스라엘이 기다려왔던 메시야라고 암시하는 셈입니다.

사람들에 세례 받으로 예수님에게 간다는 말을 전해 들은 요한은 이제 자신의 사역이 끝나간다는 것을 알았을 것 같습니다. 길을 예배하는 자로서의 자신의 사명은 이제 시한이 다했다는 깨달음이 왔을 것 같습니다. 세례 요한은 이를 기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소명을 받기도 하겠습니다. 서서히 사라져야 하는 소명.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때 자신은 이제 잊혀진 존재가 되는 것. 하지만 세례 요한은 기뻐합니다. 자신의 소명이 즉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에 기뻐합니다. 세례 요한은 참으로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말라기 이후 오래만에 유대 사회에 나타난 선지자로 여겨졌습니다. 이 대목은 이제 구약 선지자의 시대가 끝나고 메시아의 시대가 시작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라 합니다.

31절에서 36절 까지는 저자 요한의 보이스로 앞서 했던 얘기들을 다시 정리하는 글입니다. 눈에 띄는 구절은 36절의 ‘영생이 있고’ 입니다. ‘영생’은 먼 미래에 얻게 되는 무언가가 아니라, 현재 이미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좀 뒤에 보면 ‘영생을 보지 못하고’라는 표현도 있습니다. 자세히 보면 ‘믿음이 없으면 영생을 보지 못한다’라고 되어 있지 않습니다.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가 영생을 보지 못합니다. ‘믿음’과 ‘순종’이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믿음’은 곧 ‘순종’이 전제될 수 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만의 메시야가 아니라 온 세상의 메시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에 대한 믿음 또는 순종을 통해 우리는 영생을 얻게 됩니다. 요한 복음에서의 ‘영생’은 곧 ‘하나님 나라’하고 개념적으로 같다고 합니다. 일상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는 삶을 ‘믿음’의 ‘순종’을 통해 누리실 수 있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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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2월 요한복음 2장

01.06 요한복음 2:1~12

2장 1절은 ‘사흘째’ 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좀 뜽금없습니다. 갑자기 왜 ‘사흘째’ 인지 앞의 구절들만 봐서는 알 수 없습니다.

지난 번에 나다나엘을 3일차에 만났다고 했는데, 자세히 보니, 5일차였습니다. 3일차는 요한의 두 제자가 예수님을 만난 날, 4일차는 안드레가 시몬을 데리고 온 날, 5일차가 나다나엘을 만나신 날이 되겠습니다. 갈릴리 가나로 이동하는 시간을 고려하면 6일차는 아마도 하루 종일 이동만 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2장1절의 날은 7일차 입니다. 이렇게 요한복음의 첫주간은 예수님의 첫번째 표적으로 완성됩니다.

‘표적’이란 말은 요한복음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톰 라이트는 ‘표적이란, 적은 믿음만이라도 갖고 지켜보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이 계신 곳에서 하나님의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 순간이다. 표적이란 하늘이 열리고,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이 현 세계 속으로 뿜어져 들어오는 순간’이라고 합니다.

2:5절에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라는 문장이 의미심장합니다. 이 세상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을 지라도, 예수님의 말씀대로 순종할 때, 하늘이 열려서 변할 것 같지 않던 이 땅의 현실이 변화하게 된다는 사례를 보여줍니다.

왜 ‘포도주’일까요? 그냥 그 무렵 잔치에서는 늘 포도주를 마셔서 일까요? 구약시대부터 유대교의 전통은 ‘혼인’과 ‘포도주’를 메시아 시대의 축복과 기쁨을 나타내는 상징이라고 합니다. 이사야서 25:6~8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

6.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 산에서 만민을 위하여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포도주로 연회를 베푸시리니 곧 골수가 가득한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맑은 포도주로 하실 것이며
7.
또 이 산에서 모든 민족의 얼굴을 가린 가리개와 열방 위에 덮인 덮개를 제하시며
8.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자기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포도주로 상징되는 그 날의 기쁨은 ‘사망을 멸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2:11에서 언급하듯이 요한복음의 첫번째 표적인 포도주 변화의 표적은 이렇게 마지막 표적인 부활의 표적과 연결이 됩니다. 이 첫 표적은 공적 사역이전이기 때문에 제자들과 가까운 가족들만 지켜보았을 것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부활의 표적은 제자들에게만 보여졌습니다.

십자가에서 부활까지의 일들은 2:4절에 예수님의 입으로 ‘내 때’라는 표현에서 암시됩니다.

요한은 아마도 ‘사흘째’라는 말을 요한복음을 읽는 당시의 성도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생각나게 하기 위한 용도로 쓰지 않았을까 생각되기도 합니다.

이 구절에서 꼭 예수님이 하라는 대로 순종하자라는 적용점만 볼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 본문 전체를 그대로 묵상하면서, 담긴 의미들을 되새기는 것으로도 이미 충분하지 않을까 합니다. 요한복음이 앞으로 어떤 얘기들을 펼쳐나갈지 기대하면서 하나님께서 이루신 놀라운 일에 감사하는 저녁 되시기를 바랍니다.

01.07 요한복음 2:13~25

오늘 본문은 다른 공관복음서에도 언급되고 있는 성전정화사건입니다. 때는 유월절이 가까운 때로서 여러 지방에서 올라온 순례자들로 붐비는 때였습니다. 요한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 했을 때, 그 어린 양의 이미지는 출애굽기 앞부분의 유월절 어린 양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성전정화사건을 벌이신 시점이 유월절에 가까운 때라는 것을 쓰면서 요한이 강조하는 바는 결국 그 구절과 같습니다.

예수님이 짐승을 파는 사람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성전 안’에 있는 것을 보시고서 분노하신 이유는 다른 복음서에 나와 있다시피 이방인의 뜰을 그들이 차지함으로 말미암아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예배하지 못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성전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이 일에 대한 주변 사람들이 반응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어찌보면 낯선 30대 초반의 젊은이가 들어와 행패를 부리고, 소동을 일으킨 사건입니다. 그런데, 아무도 예수님을 끌어내거나 제지하지 않습니다. 일단 제자들은 예수님의 그 모습을 단순한 분노라기 보다는 시편 69편 9절의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으로 인식했습니다(17절). 이어지는  ‘나를 삼키리라’는 구절에서 제자들도 이러한 사건이 결코 그냥 지나가지 않을 것으로 느꼈던 것 같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다른 유대인들의 반응입니다.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 (18절)라고 질문합니다. 생각보다 신중합니다. 오히려 너무 엄청난 사건이라서 그들의 반응이 도리어 조심스러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달리 보면 그만큼 예수님에게서 어떤 영적인 권위를 그들이 느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혹시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일 수도 있다고 짐작한 정도에 그칩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잘 아시다시피,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애매모호한 말씀이었습니다. ‘사흘’이라는 단어가 또 나옵니다(19절). 그 무렵에 그 말씀을 들었던 어느 누구도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과거를 회상하는 사도 요한은 정확히 얘기합니다.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21절). 하지만, 제자들에게 있어서 이 모든 깨달음은 부활 뒤에야 가능했습니다 (22절). 그 전에는 전혀 이해할 수 없었지요. 그들은 복음서 끝까지 다윗과 같은 이스라엘의 왕으로서의 예수님이라는 고정 관념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 사건은 어찌 보면 하나님이 당신의 성전에 직접 오셔서 심판하신 사건입니다. 더 이상 이런 장사하는 집은 성전이 아니라, 예수 자신이 성전이라고 하나님이 직접 선포하시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이 사건은 하나님이 직접 그 임재 또는 영광을 드러내신 사건으로 요한복음의 두번째 표적이 됩니다. 기적이 표적이라기 보다, 표적은 하나님의 임재가 드러난 사건입니다. 그 표적은 유월절 기간에 일어났다고 요한은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23절).

요한복음 2장은 이렇게 두가지 표적으로 마무리됩니다. 많은 단어들이 유대교 전통에서의 의미를 바탕으로 미래를 암시하는 목적으로 사용됩니다. ‘사흘’, ‘포도주’, ‘유월절’, ‘성전’ 등 이 모든 이미지들은 구약의 성경 구절들을 바탕으로 앞으로의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과 부활, 승천까지 연결이 되면서 요한복음 전체의 내용을 암묵적으로 전합니다.

사도 요한이 인생의 막바지에서 돌아보는 관점에서 예수님의 공생애를 재구성할 때,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 하나하나를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았는지, 어떤 의미를 담았는지가 결국 요한복음 전체의 주제로 수렴하게 됩니다. 그것이 곧 요한복음을 통해서 전해지는 하나님의 메시지일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메시지를 풍성히 담아내는 묵상의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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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에 읽은 책들

2019년에 읽은 책들.

올해는 90여권 밖에 못 읽었다.
하반기에 신약 성서 통독한 것과
8월말에 시작한 <괴델, 에셔, 바흐>를 이제 겨우 절반 정도 읽고 있기 때문일 듯.
(읽어도 읽어도 끝나질 않는 책…)

올해 읽은 책 중 분야별 베스트는

기독교: 요람 하조니, <에스더서로 고찰하는 하나님과 정치>
정치, 외교: 그레이엄 엘리슨, <예정된 전쟁>
경제, 사회: 재레드 다이아몬드, <대변동>

O: 강력 추천, 한 번 더 읽고 싶은 책들
A: 무난함. (A=average)
X: 이 책들은 안 읽어도 무방. (리스트에서 제외)

<기독교>
O. 에스더서로 고찰하는 하나님과 정치 – 요람 하조니/김구원
https://wp.me/p10GgZ-1GR
O. 복음의 공공성 – 김근주/비아토르
O. 텍스트를 넘어 콘텍스트로 – 최종원 https://wp.me/p10GgZ-1Hr
O. 특강 예레미야 – 김근주
O. 성육신의 관점에서 본 성경 영감설 – 피터 엔즈/김구원 https://wp.me/p10GgZ-1xF
O. 고대 유대교의 터, 무늬 – 박정수
O. 이것이 복음이다 – 톰 라이트
O. 중근동의 눈으로 읽는 성경 – 김동문
O. 갈라디아서 어떻게 읽을 것인가 – 권연경
O. 요한복음 뒷조사 – 김민석
O. 일터행전 – 방선오
O. 마가가 전하는 예수이야기 – 베르너 H. 켈버/김태훈
A. 정서적으로 건강한 리더 – 피터 스카지로/정성묵
A.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 – 이재훈

<정치, 외교, 지정학>
O: 예정된 전쟁 – 그레이엄 앨리슨/정혜윤 https://wp.me/p10GgZ-1I0
O. 분열하는 제국 – 콜린 우다드/정유진
O. 예정된 위기 – 안병진 https://wp.me/p10GgZ-1I0
O: 도쿄 30년, 일본 정치를 꿰뚫다 – 이헌모 https://wp.me/p10GgZ-1HE
O. 트럼프, 붕괴를 완성하다 – 안병진 https://wp.me/p10GgZ-1Jw
O. 21세기 미국의 패권과 지정학 – 피터 자이한/홍지수 https://wp.me/p10GgZ-1Iw
O. 셰일 혁명과 미국 없는 세계 – 피터 자이한/홍지수 https://wp.me/p10GgZ-1Jd
A. 거대한 코끼리, 중국의 진실 – 임명묵
A. 전쟁의 역사를 통해 배우는 지정학 – 다카하시 요이치/김정환
A. 앞으로 5년 미중 전쟁 시나리오 – 최윤식

<경제, 사회>
O. 대변동: 위기, 선택, 변화 – 재래드 다이아몬드/강주헌
O. 붕괴 – 애덤 투즈/우진하 https://wp.me/p10GgZ-1HA
O. 빅히트 – 김한진, 김일구, 김동환
https://wp.me/p10GgZ-1Me
O. 50대 사건으로 보는 돈의 역사 – 홍춘욱
O. 2020 부의 지각 변동 – 박종훈
O. 앞으로 3년 경제 전쟁의 미래 – 오건영
O. 경제 트렌드 2019 – 김일구, 김한진, 김동환
O. 밀레니얼 이코노미 – 홍춘욱, 박종훈
O. 일본경제 부담없이 읽기 – 강철구

<과학, 기술 및 기타 트렌드>
O. 제 2의 기계 시대 – 에릭 브린욜프슨, 앤드루 맥아피/이한음
https://wp.me/p10GgZ-1Mi
O. 반도체 제국의 미래 – 정인성
O. 커넥톰, 뇌의 지도 – 승현준
O. 인공지능 비즈니스 트렌드 – 테크니들
O. 직장이 없는 시대가 온다 – 새라 캐슬러
O. 머신 플랫폼 크라우드 – 앤드류 맥아피, 에릭 브린욜프슨
O. 데이터 분석의 힘 – 이토 고이치로
A. 떨림과 울림 – 김상욱

<경영>
O. 직장 내공 – 스테르담
O. 리더는 하루에 백 번 싸운다. – 조우성
O. 나는 왜 출근만 하면 예민해질까? – 머리 매킨타이어
O. 컨테이져스: 전략적 입소문 – 조나 버거, 정윤미 https://wp.me/p10GgZ-1Lx
A. 90년생이 온다 – 임홍택
A. 마키아벨리 회사에 가다 – 페터놀/김이섭/황금가지

<투자>
O. 블랙 스완 –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
O. 행운에 속지 마라 –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이건/중앙books
O. 하워드 막스 투자와 마켓 싸이클의 법칙 – 하워드 막스
O. 투자에 대한 생각 – 하워드 막스
O. 통섭과 투자 – 마이클 J. 모부신/이건, 오인석/에프엔미디어
O. 전설로 떠나는 월가의 영웅 -피터 린치, 존 로스차일드/이건/국일증권경제연구소
O. 모닝스타 성공투자 5원칙 – 팻 도시/조성숙, 지승룡, 조영로/이콘
O. 주식시장을 이기는 작은책 – 조엘 그린블라트/안진환/알키
O. 부의 비밀병기, IF – 조원경
https://wp.me/p10GgZ-1Mk
O. 인공지능 투자가 퀀트 – 권용진
A. 서울 부동산의 미래 – 김학렬

<문학>
O. 돈키호테 2 – 미겔 데 세르반테스/안영옥/열린책들
O. 하늘의 물레 – 어슐러 르귄
O. 고독한 시월의 밤 – 로저 젤라즈니
O. 나니아 연대기 중 마법사의 조카, 사자와 마녀의 옷장, 말과 소년, 캐스피언 왕자 – C.S. 루이스
O. 삼체 1, 2부 – 류츠신
O. Death’s End (삼체 3부) – 류츠신
O. 타인들 속에서 – 조 월튼/김민혜
O. 식스 웨이크 – 무르 래퍼티
O. 미생 1 – 윤태호
O. 박사가 사랑한 수식 – 오가와 요코/김난주
O. 화이트리스트 – 박철현
O.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 6, 7 – 미카미 엔
A. 별의 계승자 4, 5 – 제임스 P. 호건
A. 한자와 나오키 1 – 이케이도 준

<에세이>
O. 독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 – 야마구치 슈, 김지영
A. 인생이란 나를 믿고 가는 것이다 – 이현세/토네이도
A. 리뷰 쓰는 법 – 가와사키 쇼헤이
A. 책으로 변한 내 인생 – 이재범(핑크팬더)/평단문화사
A. 원씽 The One Thing – 게리 켈러, 제이 파파산/구세희/비즈니스북스
A. 생각의 비밀, 김밥 파는 CEO, 부자의 탄생을 말하다 – 김승호/황금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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