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2월 요한복음 1장

01.01 요한복음 1:1~13

말씀: 헬라인들에게나 현대인들에게나 ‘말씀’이라 하면 뭔가 추상적인 느낌을 주지만, 요한복음에서는 구체적인 존재로서 제시됩니다. 하나님과 함께하셨고, 하나님이시기도 하며, 심지어 지상에까지 내려와서 함께 하기까지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추상적인 교리에 대한 동의라기 보다는 구체적인 존재에 대한 신뢰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 라고 부르셨을 때, 당시 유대인들은 당황했었습니다. 불경스럽다고 생각했었지요.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을 새롭게 얻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영생? 영생은 또 무엇인지. 요한복음을 계속 읽어나가면 알 수 있겠지요.

일반적으로 믿어지는 바와는 다르게, 바울 서신보다 복음서가 나중에 기록되었습니다. 사도들이 나이가 들고, 세상을 떠날 때가 가까와지면서 그들의 기억을 남겨 놓아야겠다 싶어 기록된 것이 복음서들이라 합니다. 복음서 중에서는 마가복음이 가장 먼저 기록되었다 하고,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각각 마가복음을 참고로 해서 씌어졌습니다. 요한복음은 마태와 누가와는 다른 접근 방법을 취합니다. 마태와 누가는 마가복음의 내용을 더 상세히 기록했다고 하면, 요한복음은 마가복음에 있는 내용은 굳이 언급하지 않는 것 처럼 보인다고 합니다. 그러한 여백을 남겨 놓고 진행된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겠습니다.

요한복음의 저자가 마태와 공통되면서 누가와 마가와 다른 점이 있다면, 요한복음은 사도 요한의 증언을 토대로 씌어졌다는 점이겠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무척이나 구체적이고, 직접 예수님과 함께 했었기에 가능한 디테일이 살아 있다고도 합니다. 삶의 마지막에 도달한 사도가 젊었을 때 함께 했던 예수님을 회상하며 기록한 요한복음에는, 그 시절에 대한 그리움과 당시의 감격응ㄹ 생생하게 느끼게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반면에 요한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말씀과 행하신 표적들은 상징적인 면이 많아서 구약의 전통을 온전히 들여다 보지 않으면 그 깊이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고도 합니다.

그러한 구약의 전통은 요한복음 1장 1절부터 그 울림을 전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 도입부를 연상시키는 1~5절의 구절들이 가지는 이 당당함은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제자들이 비로소 깨달은 바가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보여줍니다. 보혜사 성령께서 주신 지혜로 그들은 구약을 다시 해석하여, 이제는 예수님이 세상의 창조될 때 하나님과 함께 하셨음을 선포합니다. 그 이름을 믿는 자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것은 그 이름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과 동격이기에 가능한 얘기이겠습니다.

요한복음은 그 예수님을 소개하는 성경입니다. 이번에 읽을 때는 어떤 새로운 깨달음을 건져낼 수 있을지 기대가 됩니다.

개인적으로 새로운 한 해의 시작을 요한복음을 깊이 찾아보고 묵상하는 것으로 시작하고자 합니다.

작심 삼일로 끝나지 않기를 바라며…

 

01.02 요한복음 1:14~18

요한복음의 1:1~18절까지는 이 복음서의 서문과도 같은 문단으로서 수미상관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A: 1:1~5 – 창조 때부터 하나님과 함께 하셨던 말씀.
B: 1:6~8 – 빛에 대한 요한의 증언
C: 1:9~14 – 말씀의 성육신 및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
B’: 1:15 – 요한의 증언
A’: 1:16~18 –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

요한의 증언을 중심으로 9~14절이 이 서문의 가장 핵심 주제가 되는 문장들이 됩니다.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말씀’이란 말이 ‘영광’이란 말과 같이 나올 때, 많은 유대인들은 자연스럽게 시내산에서 모세가 율법을 받던 순간을 떠올릴 겁니다. 그때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을 감히 쳐다보지도 못했습니다. 하지만, 14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과 끝까지 함께 했던 요한을 포함한 제자들입니다.

모세와 같은 두려움 없이 영광을 볼 수 있었던 것은 ‘말씀이 육신이’ 되었기 때문이겠습니다. 이것은 이사야 40:5의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는 예언의 실현이기도 합니다. 이사야 때에는 어떻게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을지 알지 못했을 겁니다.

어쩌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특권은 예수님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온전히 볼 수 있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하나님의 영광은 예수님의 성육신이라는 사랑의 사역을 통해서 우리에게 드러났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봄으로서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임마누엘 언약의 실현이기도 하지요.

요한복음은 이렇게 1~18절의 서문을 통해 예수님이 어떤 존재인지를 선언하면서 시작합니다.

하루하루의 삶 가운데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기억하며 바라볼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01.03 요한복음 1:19~28

요한이 세례를 베풀던 곳은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란 곳이었습니다. 요한복음의 첫 주를 여는 사건인 요한이 세례는 베다니에서 시작하는데, 흥미롭게도 수난주간이 시작되는 12:1절은 예루살렘 근처의 베다니에서 시작합니다. 같은 이름을 지닌 다른 지명입니다. 요한복음이 거대한 수미상관구조라고 여겨지게 하는 구절들입니다.

요한은 자기 자신을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하면서 뒤에 오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드러냅니다. 요한은 이사야40:3절을 인용했습니다.

40:3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주의 길’은 곧 ‘하나님의 대로’ 였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온전히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이사야서 40장은 3절 뒤로 다음과 같이 이어집니다.

6. 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7.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구절이 나옵니다. 요한 복음 앞부분에서 요한은 ‘말씀’이 태초부터 계셨음을 증언했습니다. 이 이사야의 예언에 대한 인용을 들었을 때, 유대인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하는 구절을 기억했을 겁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에 대한 이미지를 계속 이어가는 셈입니다.

요한복음은 세례 요한의 입을 빌려서, 예수님이 오시는 것은 하나님이 이 땅에 임하신다는 예언의 실현이라고 선포합니다.

뒤에 나오는 부분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나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호칭하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이해는 부분적이었습니다. 그러한 부분적인 이해는 결국 에수님이 자기들의 기대와 다른 모습을 보였을 때 불순종으로이어졌습니다.

요한만이 예수님을 이 땅에 오신 하나님으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온전한 인식은 겸손을 낳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떠받을어질 수 있었지만, 요한은 냉정하게 자신의 위치를 지킵니다. 그렇게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예언의 사명을 완수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인식을 통해서만이, 그 하나님 앞에서 있는 나를 온전히 인식할 수 있고, 그때 내가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를 겸손히 깨달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01.04 요한복음 1:29~42

29절은 ‘다음날’이란 말로 시작합니다. 요한의 증언이 첫 날, 예수님을 직접 만난 것이 그 다음 날이라고 저자 요한은 전합니다. 두번째 날 예수님이 요한 앞에 나아옵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어린 양’이라 표현합니다. 우리의 성경에 대한 상식과는 좀 다르게 ‘어린 양’의 이미지는 속죄제나 희생제사 이전에 유월절 어린 양의 이미지입니다. 유월절은 속죄제의 율법이 전해지기 전인 출애굽기에서 기원합니다. 하나님이 애굽에서의 종살이에서 구원하신 것과 같이 이제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더 오래된 종살이에서 구원해 내시려 한다는 메시지를 세례 요한은 전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죽음이 일어난 시간이 성전에서 유월절 어린 양을 잡는 오후라고 얘기하는 것이 이러한 맥락과도 일치합니다.

세례 요한은 그 예수님을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분’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얘기합니다. ‘성령 세례’를 위해서는 준비가 필요합니다. 죄로 오염된 우리 안의 성전이 예수님의 보혈로 깨끗하게 준비된 다음에나 가능할 것입니다. ‘성령 세례’라는 말에서 이미 ‘더 오래된 종살이’란 결국 ‘죄’의 사슬이란 것이 암시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분’은 진정 하나님 자신 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을 비롯한 많은 추종자들은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이미지를 더 붙잡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바른 인식이 없이 자신의 바램이 투영된 인식은 제자들을 예수님과 계속 엇나가게 하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그 이후로부터 중세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기독교의 역사에서 계속 벌어지고 있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뒷전이고 이제 자신의 욕망 만이 남은 것처럼 보이는 모습도 우린 더러 목격하곤 합니다.

무엇이 나의 욕망이 투영된 인식인지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것. 다른 영역에서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신앙에 대한 제대로 된 메타인지가 영적 성숙의 중요한 요소일 것 같습니다.

일상을 살아가면서 자신의 욕망을 제대로 분별하여 배제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삶이 경쟁에 기반한 성과주의 사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한 쉽지 않습니다. 제 마음을 하나님의 성령이 순간순간 지켜 주시길 기도할 뿐입니다.

01.05. 요한복음 1:43~51

1:43절은 ‘다음날’이란 말로 시작합니다. 1일차 요한의 증언, 2일차 예수님이 요한에게 나아오심. 3일차 빌립과 나다나엘이 제자가 됩니다.

짧은 구절입니다. 3일차라는 구체적인 시간에 구체적인 사람들이 나타나지만, 참으로 많은 상징이 담겨 있습니다.

1:35~43 사이에서 ‘따르다’라는 동사가 4회 사용됩니다. 그 중의 3회는 안드레와 무명의 제자가 예수님을 따라오는 행동을 묘사한 단어지만, 43절에서 예수님의 명령으로 나타나면서 Calling의 의미를 담고 사용됩니다. 여기서부터 비로소 ‘예수님을 따르는 자’라는 의미에서 ‘예수님의 제자’란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합니다. 요한이 ‘따르다’라는 동사를 상당히 신중하게 사용하는 것으로 보이기에 향후 요한복음을 읽어나가면서 염두에 두면 좋을 것 같습니다.

어제 큐티 내용 중, 2일차에 만났던 두 명의 제자중 한 명은 안드레인데, 다른 한명은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것이 이상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이상하게 느끼셔야 합니다.) 저자 요한, 곧 사랑받는 제자 요한일 것이라고 추정한다고 합니다. 왜 그런 추정들이 나오는지는 요한 복음 후반부에 가면 더 확실해진다고 합니다.

39절에 ‘그러므로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 라는 문장은 이 문장의 표면적 의미 외에 다른 어떤 의미도 없는, 아주 구체적인 문장입니다. 이런 문장은 왜 들어갔을까요?

나이들어 요한복음을 저술하는 저자 요한의 입장에서, 자신의 젊은 때에 예수님을 처음 만났던 그 때를 회상하는 마음이 어떠했을지 생각해 보면, 저 문장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랍비’, ‘메시아’와 ‘게바’라는 히브리어를 굳이 쓰고 헬라 번역어를 굳이 첨부한 모습도 그러합니다. 아마 사도 요한은 그가 예수님을 처음 만났던 그 젊은 날,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그대로 기억하고 그대로 기록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삶에서 처음 만났던 순간을 기억하시는 분이 많으실 겁니다. 그때 어떤 감정, 어떤 느낌이었을지요. 그 순간을 회상하는 사도 요한의 마음도 아마 짐작이 가실 겁니다.

48절 ‘무화과 나무 아래 앉아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미가서 4:4절에 ‘각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을 것이라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니’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미가서 4:1절은 ‘끝날에 이르러는 여호와의 전의 산이 산들의 꼭대기에 굳게 서며’ 라고 얘기합니다. 다른 소 예언서인 스바냐서 3:15절에는 ‘이스라엘 왕 여호와가 네 가운데 계시니 네가 다시는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 라고 합니다. 즉 ‘무화과 나무 아래 앉아 있다’는 이미지는 ‘그 날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약속을, 구약에 친숙한 유대인들에게 상기시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더 큰 일을 보리라’고 하시면서 51절에서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라고 하십니다. 이 구절은 야곱이 아버지의 집을 떠날 때 꿈을 꾸었던 내용을 연상시킵니다. 창 3:12절에 ‘(야곱이)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라고 나와 있습니다.

요한복음 1:51에서 ‘인자’는 예수님이 자기 자신을 가리키는 대명사이기에 창 3:12절과 비교하면, 예수님이 스스로를 마치 야곱이 본 ‘사다리’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 구절이 정확히 무슨 의미로 예수님이 말씀하셨는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의견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늘과 연결되는 통로로서의 예수님을 의미하다 라는 의견. ‘사다리’의 히브리어가 ‘높이 올라감’, ‘높이 들림’의 의미를 가지는 어근을 가지고 있어서 예수님의 ‘높이 들림’, 또는 ‘승천’을 의미한다고 하는 의견도 있습니다.

야곱은 꿈을 꾸고나서 그곳을 ‘벧엘’이라 하고 그 자리에 돌을 쌓아서 표시합니다. 나중에 자신의 자손들과 돌아왔을 때, 그때까지도 자신의 가족에 남아있던 우상 숭배를 최종적으로 제거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자고 할 때 이렇게 얘기합니다. ‘벧엘로 올라가자’. 이후 벧엘은 이스라엘 민족의 성소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야곱의 꿈과 연결시키셨을 때, 요한은 (그 당시에는 잘 몰랐겠지만 적어도 기록하는 시점에서는) 아마도 예수님이 이루실 일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였을 것 같습니다. 즉 기존의 성전을 폐하고, 새로운 성전의 시대를 직접 시작하신다는 의미. 우리 안에 성령이 거하시는 그 시대, 하늘이 열리고 천사가 오르락 내리락 할 법한 일들이 예수님을 통해, 그를 따르는 제자들을 통해 일어나는 것을 볼 것이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였을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중요한 두가지 상징이 있었습니다. ‘무화과 나무’ 상징과 (본문에 사용된 단어는 아니지만) ‘사다리’ 상징이 있습니다. 이 모두 하나님이 온 세상에 직접 임하시는 그 날에 대한 언약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건 곧 예수님이 앞으로 걸어가실 길, 그 사역과도 직접적으로 관련됩니다.

물론 이러한 예수님의 의도는 여전히 제자들에게는 다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나다나엘이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라고 했을 때, 여전히 그의 이해는 부분적인 이해에 그치는 것으로 보입니다.

매일매일의 일상에 매몰되어 살지만,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일이 어떤 스케일의 일인지, 얼마나 큰 일인지 말씀을 읽을 때만이라도 돌아볼 수 있길 원합니다. 그 넓은 하나님의 눈으로 나의 좁은 일상을 돌아볼 수 있는 지혜를 주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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