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결이 바람이 될 때 – 서두에 인용된 시를 통해 보는 제목의 의미

미국의 30대의 젊은 신경외과의사가 레지던트를 마치던 무렵에 폐암으로 진단을 받습니다. 암치료를 받고 어느 정도 치유되지만, 암이 완전히 뿌리뽑인 것은 아니었나 봅니다.

결국 암이 재발하였고, 치료가 어려울 정도로 심가했습니다. 그는 어린 딸과 아내를 남기고 세상을 떠납니다. 이 책은 암진단을 받기까지의 그의 삶에 대한 자전적인 이야기와 암진단을 받고 나서의 과정, 그리고 그가 더이상 쓸 수 없게 된 뒤의 과정을 그린 그의 아내의 글, 그렇게 세가지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미국이라는 지역, 의사라는 직업, 30대라는 젊은 나이, 때이른 암진단.이 세가지 요소만으로도 충분히 사람들의 관심을 유발하는 스토리일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책을 보다 특별하게 만드는 요소는 그런 요소들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 책에 스며 있는 이 젊은 의사의 삶의 의미를 찾는 과정은 이 책을 보다 특별하게 만듭니다.삶과 죽음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으로서의 그의 전반부 삶이 그려지고, 암진단을 받으면서 더 그런 과정을 지속하는 모습이 묵직한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존경스러우면서도 부럽더군요. 그런 질문을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더라도, 그런 답은 쉬는 시간에나 찾는 거라 생각하고 답을 찾는 과정을 직업으로 삼을 생각까지는 못했던 게 꼭 제 자신의 소극성 때문만은 아니지 싶습니다.

책의 본문이 시작하는 그 앞에 있던 시가 참 멋있습니다.

책 제목이 이 시에서 나왔지요.

처음 우리말 번역을 읽고도 무슨 뜻인지 와 닿지 않았고,

영어 원문을 읽어도 잘 모르겠던데, 두가지를 계속 같이 읽어보니

뜻이 조금씩 이해가 되었습니다.

You that seek what life is in death, 죽음 속에서 삶이 무엇인지 찾으려 하는 자는,

Now find it air that once was breath. 그것이 한때 숨결이었던 바람이란 걸 알게 된다.

New names unknown, old names gone: 새로운 이름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고, 오래된 이름은 이미 사라졌다.

Till time end bodies, but souls none. 세월은 육신을 쓰러뜨리지만, 영혼은 죽지 않느다.

Reader! then make time, while you be, 독자여! 생전에 서둘러

But steps to your eternity. 영원으로 발길을 들여 놓으라

브루크 풀크 그레빌 남작

일단 두 행씩 라임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것을 염두에 두고서 소리내어 영어로 읽어보면, 묘한 리듬감이 느껴집니다. 이런 시를 번역하시는 분들 참 대단하시다는 생각입니다 저같은 이공계는 저런 문학적인 문장은 뜻도 잘 짐작이 안되거든요.

다만, 우리말 번역과 영어 원문을 보다가 보니, 우리말 번역에서 조금 빠진 부분이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아래는 원래 번역의 탁월함에 힘입어 그 위에 한 숟가락 더 얹어본 번역입니다.

You that seek what life is in death, 당신, 죽음 안에서의 삶이 무엇인지 찾으려 한다면,

Now find it air that once was breath. 이제 깨달을지어다, 그것이 한때는 숨결이었던 바람이란걸.

New names unknown, old names gone: 새 이름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고, 옛 이름은 이미 사라졌다.

Till time end bodies, but souls none. 세월이 육신을 쓰러뜨리고, 영혼은 남을 그때까지.

Reader! then make time, while you be, 독자여! 열심히 살아라, 살아 있는 동안

But steps to your eternity. 영원으로부터 몇발자욱 안 떨어져 있을 지라도

번역된 문장이 있었기에 그에 기반해서 조금씩 바꿔보면서 의미를 더 깊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바꿔보려 했지만, 우리말로는 잘 전달이 안되는 느낌입니다.

이 영문 시는 크게 3개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2행, 3,4,행, 5,6행

1,2행은 도입부로 ‘you’로 지칭된 청자를 대화에 끌어들여 중요한 주제에 대해 한 번의 결론을 내립니다.

3,4행은 전개부로 인류가 처한 상황을 현재에서 미래까지 관통해서 제시합니다.

5,6행은 종결부로 ‘you’의 시선을 상황에서 자신으로 돌아보게 합니다. 상황에 대한 관찰, 깨달음으로 변화된 시선을 요구합니다.

도입 -> 전개 -> 종결… 음악에서 소나타 형식이기도 하지요.

영시를 어떻게 읽는지 잘은 모르지만, 약간 음악 스럽게

이 시는 1,2행은 조용하게 3,4행은 약간 소리높여 비장하게… 5,6행은 약간 단호하면서 결단하는 투를 흉내내서 읽어 보면 더 실감나는 것 같습니다~

이 시의 주요 포인트는 4행의 Till을 어떤 의미로 파악하느냐 입니다.

이 Till이 3행의 완료형과 연결이 되면서 3행의 의미가 변하는 느낌입니다.

과거분사가 적용 문장은 보통 ‘상태’인데, 여기에 tIll 구문이 붙으면 ‘상태’가 ‘완료’로 바뀌지요.

즉, 3행까지는 현재의 상태를 기술하는데, 이것만으로는 공허하고, 어찌보면 비참할 수 있는 상태입니다.새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고, 옛 이름은 없어졌답니다. 남은게 없는 거죠.

그런데, 4행에서 그런 상태에 종점이 있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그런 피봇같은 전환을 이루는 단어가 Till 입니다. till의 시점에 일어나는 일들이 있고, 이때 현재의 상태가 완료된다는 의미로 전환됩니다.

즉, ‘세월이 육신을 쓰러뜨리고, 영혼은 남을 그때까지’ 라는 문장이 3행에 추가됩니다.

새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고, 옛 이름은 이미 사라졌지만,

그 다음은 (아마도) 새 이름이 나타날 것이라는 것을 깔고 있는 것으로 느껴졌습니다.

4행의 이러한 의미 전환은 5행으로 이어집니다.

5행의 make time은 ‘서두르다’라는 의미도 있지만, 다른 의미들도 있습니다.

그런 여러 다른 의미들을 포함하는 전체적인 의미로 제가 이해하기에 make time은 ‘시간을 가치 있게 보내다’ 또는 ‘가치 있는 시간을 만들어내다’ 라는 의미입니다. 비슷한 맥락의 유사한 표현이 You made my day. 라는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5행은 현재를 부정하지 말고, 현재를 가치있게 보내라는 말로 다가옵니다.

6행의 but은 only의 의미인 것 같습니다.

5행과 6행을 연결해서 보면, ‘현재를 가치있게 보내라, 영원에서 몇 걸음 떨어져 있을지라도’ 인 것 같습니다.

여기서 eternity라는 단어는 4행의 Till과 연결이 됩니다. 3행의 현재가 Till에 의해서 정지된다면, 그 이후는 무엇인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eternity라는 단어로 4행의 till의 시점을 넘어서는 시간을 가리킵니다.

다시 정리하면

3행 : 아직 뭐가 뭔지 모르는 혼란스런 상태이지만,

4행 : 그런 혼란이 끝나는, 곧 죽음을 의미하는 Till의 시점에 영혼이 남는 것을 알고

5행 : 살아 있는 동안 가치 있는 삶을 이루고,

6행 : 영원에서 몇 걸음 떨어져 있을지라도

이런 의미입니다.

여기서 1행과 2행을 다시 보면,

1행의 죽음 안에서의 삶의 의미를 찾는 다는 것, 곧 육체가 쓰러지고 영혼이 남을 그때의 삶은 어떤 것일까라고 시인은 질문하는 셈입니다.

2행에서 ‘숨결’은 현재에서의 ‘삶’, ‘바람’은 죽음 이후에 이어지는 ‘삶’입니다.

작고 보잘것 없어 보이는 ‘숨결’이 더 스케일이 크고 자유로운 ‘바람’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숨결이 바람이 될 때’는 곧 ‘죽음’ 그 자체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죽음’은 더 풍성한 삶으로의 게이트의 의미를 가집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의 실마리는 3행입니다.

현재는 알려져 있지 않은 ‘새 이름’, till 이후에는 알려지게 될 ‘새 이름’ 입니다.

영원에서 몇 발자욱 안떨어져 있음을 늘 인식하면서 현재를 가치있게 살아가는 삶.

그런 삶이 이 생에서는 숨결일지라도, 결국 바람으로 풍성해질 것임을 이 시는 노래하는 것 같습니다.

시인의 이런 믿음이 저자에게도 중요한 의미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 의미를 제목으로 삼았으니까요.

암 진단 이후에도 환자를 돕는 신경외과의로서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던 저자의 삶이 이 시의 내용과 뭔가 통하는 게 있습니다.

시가 너무 좋네요. 읽어볼 수록 뭉클해집니다.

‘죽음’이란게 이 책의 저자만의 문제는 아니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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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부터는 좀 개인적인 사족입니다.

17세기의 시인과 이 책의 저자인 폴 칼라니티는 아마도 기독교 신앙을 공유한게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기독교적인 전통에서 ‘새 이름’과 ‘바람’이 가지는 특수한 의미와 그 의미들과 연관되어 표현되는 육체적인 ‘죽음’이 그런 생각이 들게 합니다. 물론 본문 중에 저자가 기독교 신앙을 가지게 되는 장면도 있어서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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