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또예프스끼의 [백치], 역시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예상했던대로…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또예프스끼, 김근식 옮김

도스또예프스키의 작품은 , , , 에 이어 다섯번째 입니다. 다섯개 작품 중에 그 중에서 가장 쉽게 읽히는 책입니다.

다만, 분량이 상당해서 읽는데 한참 걸렸습니다. 읽어도 읽어도 읽은 티가 나지 않는 책이었습니다. 상권을 1/5~14일, 하권을 14~24일이니 읽는데 20일 걸린 셈입니다. 중간에 다른 종이책도 읽기는 했지만, 소설 중에서는 이리 오래 걸린 책도 드뭅니다. 물론 예전에 책 읽을 시간이 많이 확보되지 않았을 때 의 상권, 중권이 각 한달, 하권이 20일 해서 대략 석달이 걸린 적도 있긴 합니다. (요새는 출퇴근 합산 3시간 반 정도 매일 책을 보지만, 예전에는 거의 그런 시간이 없었죠)

그렇게 오래 읽다가 보면, 앞부분의 얘기가 좀 가물가물해지더군요.

이 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인간관계가 헷갈리고, 각 인물의 배경 스토리가 서로 혼동스럽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더 읽는데 시간이 걸리는 악순환이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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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쉬깐 공작… 참 독특한 인물입니다. 어떻게 이런 인물을 창조해냈을까 싶습니다. 현실적으로 존재 가능한 인간일까 싶을 정도 입니다.

빅토르 위고의 에 나오는 그윈플레인과 데아를 연상시키는 캐릭터입니다.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각자가 가진 선한 면을 끝까지 돌아봐주는 사람.
자신에게 주어지는 어떠한 형태의 모욕이나 무례한 언사에도 진솔하고 솔직한 답변으로 대하고, 누구라도 어떻게든 용서하는 사람.

수많은 사람의 마음 깊은 곳의 아픔을 읽어내고, 그에 공감하는 사람.

매우 순진하고 간명하면서도, 그의 눈은 예리하며, 그의 통찰은 기볍지 않습니다.

이러한 미쉬깐 공작을 접한 사람들은 저마다의 모습으로 그 이전과는 다른 생각, 다른 행동을 하게 됩니다.

그만큼 그의 말과 행동은 주변 사람들에게 상당히 놀라움으로 다가오면서, 인간성 깊은 곳의 뭔가를 건드리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는 독자에게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인간은 어떤 방향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하게 되는 걸까” 라는 질문을 도스또예프스끼는 이 소설을 통해서 던지고 싶었던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생각과 언행을 결정짓는 요소는 무엇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인간은 이성적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중고등 시절에 배운 경제학에서 인간은 경제적으로 합리적인 판단을 언제나 내리는 존재라는 가정을 했었습니다.

실제 인간 사회의 경제학은 그렇지 않다는게 카너먼의 ‘행동경제학’이라고 하지요.

라는 책을 지은 사이먼 사이넥은 저 책에서 우리가 결정을 내리게 되는 뇌의 주요 영역은 이성적인 언어의 영역이 아니라고 한 기억이 납니다.

곧 ‘변연계’ 얘기입니다. 감정에 관련된 뇌의 부위로 인간의 의사 결정에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감정을 관장하는 뇌의 부위가 손상을 입은 사람은 삶에서 아주 간단한 결정도 제대로 내리지 못한다 합니다.

즉, 우리의 의사 결정의 핵심 요소는 ‘감정’이라는 겁니다.

뭔가 미리 생각해서 하는 것 처럼 보이지만, 그 생각의 근저에는 이성 보다는 감정적인 동인이 더 중요할 수 있습니다.

이 소설 에 나오는 많은 인물들이 그렇게 행동하는 것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어떤 행동을 하는데, 정작 그 행동을 왜 했는지 본인도 당장은 모르는 것으로 그리는 상황들이 반복적으로 나옵니다. 도스또예프스끼는 이미 그런 식으로 인간을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한 인간 이해는 칸트, 헤겔의 이성을 극단적으로 강조하는 독일 관념론적 이해에서 키에르케고르 이후의 실존주의적 인간 이해, 프로이트 이후의 심리학적 인간이해로 넘어가는 시점이 19세기 후반부였고, 도스또예프스끼 또한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런 흐름에 영향을 받기도 하고, 또한 본인이 그러한 흐름에 새로움과 깊이를 더했는지도 모르겠스빈다.

그런 관점에서 주요 등장인물들이 미쉬깐과 같은 인물을 만나고 접했을때, 그들의 생각과 언행은 어떤 식으로 변화하게 될까라는 질문을 생각해 보면, 결국 그들의 감정이 미쉬깐에게 어떻게 반응하느냐가 중요한 관찰포인트가 되는 것 같습니다.

미쉬깐의 ‘선한’ 영향력을 부정하지 못하면서 그를 끝없이 증오하는 사람들이 나오기도 합니다. 그를 끝없이 시도 때도없이 속여먹으려는 사람도 나오고, 그에게 자신만의 관점을 투사해서 미쉬깐을 더욱 힘들게 만들기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등장인물 하나하나 다 명확하게 생각도 나지는 않네요.

나스따시야를 보면, 그녀의 반응은 언제나 늘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본인 스스로도 본인을 알 수 없다고 해야 할까요.

또쯔끼에 대한 증오와 그로 상징되는 모든 것에 대한 증오를 기반으로 살아온 세월이 길다 보니, 그녀의 마음의 세계는 증오와 수치로 점철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미쉬깐은 그러한 그녀의 마음에 큰 충격을 안겨 줍니다. 미쉬깐을 통해서 그녀는 그 이전에 꿈꾸어보지도 못했던 새로운 마음의 세계에 대한 가능성을 엿보게 됩니다.

증오 보다는 사랑과 용서가 있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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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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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스따시야는 그로 인해 큰 혼란을 겪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녀는 그녀가 영위해온 생활 양식이 그녀에게 얼마나 독이 되는지 알고 있습니다.
스스로를 수치스럽게 생각하고, 그래서 다름 사람을 증오하는 삶이 어찌 힘들지 않겠습니까. 외롭고 쓸쓸하고 슬프기만 할 뿐이지요..

미쉬깐은 그녀의 감정에 공감하고, 그녀를 동등한 인간으로 대우해주고, 그녀를 존중받는 존재로 느끼게 합니다. 그 잠깐의 접촉이 가져온 충격이 그녀를 오히려 더욱 힘들게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이러니입니다.

미쉬깐은 그녀를 그녀의 삶의 질곡에서 끌어낼 수 있는 구원자일 수 있지만, 나스따시야는 마지막 순간에서까지 미쉬깐을 거부합니다. 받아들일 듯 하면서도 거부하게 됩니다.

저는 그 것이 어떤 큰 두려움과 불안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미쉬깐이 보여주는 세계는 나스따시야로서는 전혀 낯선 세계입니다.
단순히 낯선 정도를 넘어서 완전히 반대의 세계입니다.

이전의 세계에서 그는 자신을 숭배하고 따르는 남자들의 시선을 즐기면서도 경멸하고, 자신을 농락했던 또쯔끼를 증오했지만, 새로운 세계에서 나스따시야는 그들 모두를 용서해야 합니다.

모든 관계는 새롭게 정의되어야 하고, 모든 소통은 증오의 표현이 아닌 다른 감정의 표현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녀는 그런 셰게를 살아본 적이 없고, 자신이 증요하는 대상에게 먼저 그렇게 해야 한다는 점이 굴욕적으로 다가왔을 수도 있습니다. 그 모든 상황이 주는 압박감은 단순한 두려움과 불안을 넘어서는 것이었을 겁니다.

미쉬깐이 보여주는 구원의 길이 그녀에게 인식이 되었기에 그렇게도 미쉬깐 근처를 벗어나지 못하지만, 결국 그 길을 가지는 못합니다.

아이러니하지요.

나스따시야의 한 부분은 그 길을 가야한다고 밀어냅니다. 너무도 강력하게 밀어냅니다.
나스따시야의 다른 부분은 그 길을 두려워 합니다. 그것도 너무나 처절하게 두려워 합니다.
그래서 그녀는 결국 출발점에서 한발자욱도 나가지 못합니다.

그녀의 이성 깊은 곳에서는 그 길이 맞다고 얘기하고, 그녀의 감성 깊은 곳에서는 그 길로 가야 한다고 그녀를 밀지만, 그녀의 강력한 다른 감정은 그녀를 주저 앉힙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가 원하는 바는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감정, 어두운 정념에 속박되어 있습니다. 자유가 없이 매인 모습입니다.
비록 몸은 자유로울 지언정, 그 마음은 꽉 묶여 있는 모습입니다.

예전에 센델이 에서 ‘자유’에 대해서 했던 논의가 생각이 납니다.
얼핏 보면 역설적이기도 한 그의 논의를 한 줄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자유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이다.’

얼핏 보면 이상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을 ‘자유’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센델의 논의는 마음의 속박에 대한 부분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라 생각되는 것의 대부분은 사실 사회적인 트렌드, 유행, 일반적인 인식에 의해서 형성된 외부 요소입니다. 대부분 단기적인 쾌락과 관련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진정으로 개개인에 도움이 되는 것은 그런 ‘우리가 원하는 것’을 절제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런 인식은 사실 상식적으로 대부분 모두 동의할 수 있는 내용들입니다.

게임에 빠져서 몇 날 몇 일을 밤을 새는 것도 한 때이지 계속 그렇게 살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게임에 그 마음이 속박된 것이지요. 마약이나 알콜도 마찬가지 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 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은 그런 의미에서 자유 그 자체이기도 하고, 자유로의 열쇠이기도 합니다.

나스따시야에게 그런 자유가 없었습니다. 그녀는 끝없이 그녀를 주저 앉히는 거센 감정의 폭풍을 이겨낼 힘이 없었습니다.

애시당초 그런 힘이 없는데, 미쉬깐과의 만남에서 무슨 의미를 찾아야할까요.

이런 의미에서 미쉬깐의 존재를 다시 볼 필요가 있습니다.

미쉬깐이 없었다면, 그녀의 삶은 어땠을까요?
그녀는 방향도 없이 수치와 증오의 한가운데에서 계속 삶을 지속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좀 더 오래 살았겠지요. 로고진과 아웅다웅 하면서 어떻게든 삶을 살았을 지도 모릅니다.

결국 미쉬깐의 존재로 인해, 그녀는 마치 금단의 열매를 먹은 것처럼,
새로운 세계를 알게 된 이후로 고통스러운 방황을 하게 됩니다.
(낙원에서의 선악과는 낙원으로부터의 추방을 가져오지만, 이 금단의 열매는 낙원으로의 길을 보여주는 열매라는 측면에서 반대이기도 하지만, 일견 비슷한 면도 있지 않나 싶습니다.)

미쉬깐과의 만남이 과연 그녀의 삶에서 필요했던 것일까요?
그 만남으로 인해 그녀는 더욱 행복해졌던 것일까요? 만나지 말았어야 하는 것일까요?

쉽게 답을 내릴 수 있는 질문은 아닌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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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삶에서 중요시 여기는 가치가 무엇이냐에 따라서 답은 달라지겠지요.
어떻게든 사랑과 용서와 관용의 세계로 나가야 한다는 도덕적 진리에 손을 들어주면 미쉬깐과의 만남은 그런 의미에서 가치를 지니게 되고,

그런 것과 상관없이 일단은 살아야 한다, 수치와 증오 속에서라도 살아야 한다는 쪽이면 미쉬깐과의 만남은 그런 의미에서 가치를 상실하게 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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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평론에서도 지적하듯이, 미쉬깐은 인간의 모습으로 형상화된 예수 입니다.
기독교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던 도스또예프스끼라면, 예수는 인간과 신의 특성을 모두 지니고 있었고, 그런 결과 죽음에서 부활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미쉬깐은 그런 측면에서 예수는 아닙니다. 다만 예수의 인격적 특성의 일부를 형상화 했다고 보여집니다. 그러나 미쉬깐을 주인공으로 한 이 길디긴 소설의 결론은, 결국 인간 만의 노력으로는 결국 아무 것도 나아지는게 없을 뿐이라는 것 같습니다.

나스따시야는 죽고, 로고진은 시베리아로 가고, 아글라야는 폴란드로 가고, 다들 뿔뿔이 흩어지고, 그다지 행복하지 않은 모습으로 살아가게 되는데, 정작 공작은 다시 백치로 돌아가버린 듯 합니다.

출발점에서 더 나아진 것이라고는 찾아보기도 힘든 것 같습니다.

우리를 지배하는 감정, 감성, 정념의 힘은 막강하여, 미쉬깐과 같은 인격의 접촉을 통해서도, 우리 자신의 삶의 방향은 쉽게 바뀌지는 않는다는 것… 인간은 자신만의 힘으로는 안된다는 것.

그게 도스또예프스끼의 결론이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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